구분 | 제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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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한국의 상장례문화 | |
A
1. 서론
생물체로서의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단지 본능의 만족과 육체적 보존만을 궁극적인 삶의 목표로 삼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보다는 인간다움의 목표를 두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그러한 생물적인 삶의 방식을 제도화하고 상징화시켜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태어남과 삶, 그리고 죽음과 저승에 대한 본질적인 인간존재에 대한 의문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의 하나가 상장례이며,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교리의 핵심이 되어 있는 것이다. 본능의 만족과 육체적 보존만을 위한 생물체의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 활동과 기능의 정지를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다움에 궁극적인 목표를 둔 사회적 존재인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사회적 활동과 기능의 정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인간의 사회적 활동과 기능은 기본적으로 그 사회의 역할체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죽음은 바로 개개인이 맡고 있는 역할의 중단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따라서 죽음은 사회적 구성원의 손실과 함께 역할체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명확한 역할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 즉 어린아이나 고아, 또는 거지와 같은 사람들의 죽음에는 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사람의 죽음에 있어서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역할을 고려하는가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상장례의 내용은 큰 차이를 나타낸다. 그 내용은 대체로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시신을 처리하는 경우와, 둘째 일정한 격식과 절차를 거쳐서 시신을 처리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첫째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개죽음’이라고 하여, 마치 동물의 죽음과 같이 취급하며, 둘째의 경우는 죽음의 세계에 대한 관념에 따라 2종류로 나누어진다. 즉, 죽음의 세계를 무서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곳에서는 시신도 역시 무서운 존재로 다루어 처리하는 방법을 따르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죽은 사람을 신의 존재로 전환시키는 절차에 따라, 시신을 다루는 방법도 그에 따르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인류학자인 A. W. Malefijt는 그의 저서 『종교와 문화, Religion and Culture』에서 이러한 의례를 각각 사자의례(cult of the dead)와 조상숭배(ancestor worship)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활동에 있어서 죽은 사람의 역할에 대한 기대의 차이에 의해서 생긴다. 죽은 사람은 두렵게 보는 사회에서는 사자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는 관념의 반영이며, 조상으로서의 보고 있는 사회에서는 그들의 역할을 지속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자의례에서는 사자를 될 수 있으면 이승과 분리시키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조상숭배에서는 조상을 이승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사자의례에서는 사자가 이승에 대한 생각을 잊도록 하기 위해서 저승에서 가능한 한 행복하게 머물도록 하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많이 들여 시신을 처리한다. 그러나 조상숭배는 조상이 세상에 계속 머물러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승의 사람과 계속적인 관계를 맺도록 하는 장치를 마련한다. 따라서 오히려 이승에서 죽은 조상을 계속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기념물 건립과 같은 것에 시간과 돈을 들인다. 이러한 관념은 상장례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우선 사자의례에서는 사자가 이승에서 소유하고 있는 물건들을 없애 버리거나 파괴해 버린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자에 대한 기억을 빨리 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상숭배에서 될수록 조상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죽은 조상에 대한 기억이 계속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장례의 절차 가운데에서도 이러한 관념은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사자의례에 바탕을 둔 곳에서는 우선 죽은 사람의 이름을 꺼리는 반면에, 조상숭배에 기초를 둔 사회에서는 그 이름을 자꾸 드러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동시에 죽음을 보는 관점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사자의례에서는 육체적인 활동이 정지된 상태를 죽음으로 보지만, 조상숭배에서는 육체적인 활동이 정지되어 있을지라도 숨을 쉬고 있는 동안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영혼을 다루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어느 쪽에서나 사람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죽음은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혼을 다루는 방법에 있어서는 각각 다른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말하자면 사자의례에서는 영혼을 저승세계로 잘 보내는 행위가 중심이 되어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여 처리하는 행위로 되어 있는데 비해서, 조상숭배는 육체를 떠난 영혼을 다시 재결합시키고, 또 영혼을 이승에서 정중하게 모시는 행위가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이러한 관념은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하고, 시대에 따라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그럴 때에는 단지 상장례가 시신을 처리하는 행위로만 이루어진다. 영혼관에 대한 이러한 차이는 일상생활 속에서 영혼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에 의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양쪽 모두 영혼의 모습은 꿈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고 인식하지만, 특히 사자의례에서는 사자가 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저승에 대한 불만과 함께 이승에 대한 미련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럴 때에는 후손의 몸에 병으로 나타나거나 집안에서 하는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만다 그 영혼을 달래어 저승으로 잘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방법은 무당과 같은 의례전문가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러한 의례는 부정기적인 동시에 살아 있는 후손들의 모든 정성을 기울인 대접을 통해서 저승으로 보내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반면에 조상숭배는 영혼이 항상 이승에 머물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에 대접하는 식으로, 또는 정기적으로 대접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의례에서는 의례전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자의례에서의 영혼은 저승에만 머물게 되기 때문에 이승에 특별한 영혼의 거처가 필요 없지만, 조상숭배에서는 영혼이 머물 거처가 따로 이승에 마련되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각각 다른 태도는 일상생활의 사회조직에도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사자의례에서는 죽은 사람과 살아 있는 사람과의 개인적 관계로서만이 인식되고 있는 반면에, 조상숭배에서는 조상이라는 집단과 후손이라는 집단의 관계로 구성된다. 따라서 사자의례는 항상 개인의 문제가 되지만, 조상숭배에서는 항상 집단이 관계되고 있다. 왜냐하면 죽은 사람이 영혼으로써 이승의 일상생활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는 살아 있을 때의 인간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상숭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사회의 사회조직은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화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사자의례에서는 소규모 집단에 영향력을 많이 끼쳤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지연적인 기반 위에서 치러지는 의례행위가 중심이 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 나라의 상장례는 사자의례와 조상숭배가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유교와 불교에 의해서 조상숭배관념에 의한 상장례가 지배적이지만, 유ㆍ불교가 들어오기 전시대의 상장례를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기록에는 사자의례의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들에 의하면, 대체로 불교가 들어오기까지는 사자의례, 불교와 유교가 한문의 수입과 동시에 들어오면서부터는 불교식의 조상숭배가,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서서는 유교의 성리학적 조상숭배관념에 의한 상장례가 지배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서양을 통해서 기독교가 들어오고, 일제통치가 시작되면서부터는 도시적 생활양식에 알맞는 화장제가 도입되면서 조상숭배관념에 의한 상장례가 형식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나라의 보편적인 상장례는 조상숭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그 정도에 있어서는 상당히 약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선사시대 역사적 기록이 없는 시대의 상장례는 고분을 통해서 유추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고분을 통해서 보았을 때, 우선 시신을 땅 속에 묻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매장법은 시기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선사시대의 매장법은 현재까지 지방에 따라 토장(土葬), 적석총(赤石?), 지석묘(支石墓), 석상분(石箱墳), 옹관묘(甕棺墓), 목곽묘(木槨墓) 등이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토장은 두만강 어귀의 웅기 용수동에서 패총ㆍ주거지와 함께 발견되었는데,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몸은 수평으로 발을 뻗고 누워 있는 자세로 발견되었으며, 머리쪽에서는 항아리가, 다리 사이에는 석족(石鏃)을 부장하고 있다. 머리를 동쪽으로 둔 것은 해가 떠오르는 곳과 일치시킨 것으로서, 뚜렷한 영혼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항아리나 석촌은 아마도 살았을 때에 쓰던 물건이나 저승에서 삶을 계속 영위하라는 생각에서 함께 묻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토장과도 연관되는 것으로 춘천 학동에서는 굴장(堀葬)이 발견되었는데, 3구의 시체가 발을 동굴의 중앙에 모으고 머리는 각각 벽쪽으로 향하여 누워 있으며, 그 옆에는 토기, 석촉, 관옥 등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불을 피우던 노지(爐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살아 있을 때 주거용으로 사용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살던 곳을 무덤으로 사용한 것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의 예조(濊條)에 나오는 기록 즉, “병이 생기거나 사람이 죽으면 살던 집을 버리고 새 집을 짓는다”고 한 내용으로 미루어, 이 동굴도 또한 죽은 사람의 무덤으로 만들고, 거처를 버린 것으로 보인다. 적석총은 구덩이를 파거나, 또 작은 석관이나 석곽 안에 시신을 놓거나, 구덩이 없이 시신을 놓고, 돌로 쌓은 것이다. 부천군 시도나 춘천의 천전리에서 발견된 것들은 크기가 1~1.5m 정도에서, 몸을 편 채로 매장했다기보다도 다리를 구부려서 묻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시신의 살을 썩혔다가 뼈만을 추려서 매장한 후장(後葬)이었을 가능성도 눞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적석총들은 모두 동서 방향을 장축(長軸)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머리를 동쪽으로 두었을 것으로 보이며, 부장품으로는 숯, 마제석촉, 토기 등이 나오고 있다. 이것도 토장과 같이 저승에서의 생활을 생각하고 부장한 것으로 보인다. 지석묘는 무문토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까지에 이르는 기간의 대표적 분묘형태로서, 북방식ㆍ남방식ㆍ개석식으로 구분하고 있다. 대체로 한강 이북에서는 북방식과 개석식이 분포되어 있고, 이남에서는 남방식이 분포되어 있다. 개석식은 북방식의 퇴화된 형태로서 북방식의 아래구조, 즉 석실이 없는 형태라 하겠다. 반면에 밑의 받침돌이 없이 지하에 매장시설을 갖고 있는 점에서 남방식과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북방식 지석묘에서는 사람의 뼈가 발견된 예는 거의 없이 돌도끼와 돌화살촉 따위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상장례를 엿볼 수는 없으나, 대체로 토장의 것과 같았을 것으로 보인다. 남방식에서는 마제석검, 마제석촉, 홍도 등과 동검ㆍ동촉 등 청동기가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과 함께, 개석들의 크기가 6m 이상이 되는 거대한 것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족집단이나 큰 취략집단의 실력자들의 무덤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거석들을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힘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묘제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정치적으로 부족국가시대의 권력자의 무덤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지석묘들은 지하구조만이 계승되어 삼국초기, 삼한시대의 이래의 석곽묘로 발전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석상분은 석관묘라고도 부르며, 청동기시대에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구조는 4벽이 한 장씩의 판석으로 된 것과 여러 판석으로 된 것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주로 한강 이북에, 후자는 한강 이남에 분포되어 있다. 강계의 풍용동에서 발견된 석상묘는 길이가 2m 이상 되는 것도 있는 것으로 보아, 신전장(伸展葬)이었을 가능이 높으며, 머리는 서쪽으로 두고 있어 토장이나 적석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역시 항아리, 관옥, 석촉 등과 함께 청동제품 소수가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길이가 짧은 것으로 보아 굴장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석관묘는 괴석이나 판석으로 외관(外棺)을 만든 형태로서, 대전 괴정동에서 발견된 것은 청동제 일괄유물과 함께 토기, 옥제품, 마제석촉들이 함께 출토되고 있다. 길이는 2m 이상이며, 남북을 장축으로 하고 있으며, 머리는 남쪽으로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시대는 기원전 4~5세기경으로 보이며, 당시의 지배계급이나 특수한 직능을 가졌던 사람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러한 무덤들은 남한에서는 삼한시대, 삼국초기를 거쳐 기본적인 고대묘제로 발달한 것으로 보인다(김원용, 전게서). 옹관묘는 2~3개의 항아리를 붙여서 관 대신 쓴 것으로서, 남북과 동서를 장축으로 한 것이 지방마다 뒤섞여 있으며, 길이나 직경으로 보아 어른의 신전장이나 굴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른의 세골장이 아니면, 어린아이들의 관으로 생각되고 있다. 또한 부장품이 빈약한 것으로 보아 이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1~3세기경일 것으로 추측되며, 특수한 이주집단의 묘제일 것으로 보고 있다. 토광목곽묘는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걸친 묘제로서, 장방형의 토광을 파고, 내부에 상자형의 목곽을 짜서 봉토를 올린 것이다. 위만조선과 낙랑군 시대의 권력자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토광의 크기는 대체로 길이 3m 정도로서, 모두 남북을 장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장품은 대부분 청동기가 아니면 청동기와 철제품으로서 그 시기는 기원전후부터 2세기경에 걸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묘제로 보아, 선사시대의 장례에서는 원래 머리를 동쪽으로 두고 있었으나 나중에 북쪽이나 서쪽으로 두고 있는 것과 함께 다른 형식의 묘제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만주, 시베리아, 중국 등으로부터의 집단이주나 문화적 영향의 결과로 보이나, 아직까지는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지 않다. 이때의 경제적 조건은 부장품의 성격으로 보아 농업보다는 수렵이나 채집생활이 보다 보편적이었을 것으로 보여지며, 청동기는 무기류와 함께 의례용으로 보이는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점은 영혼으로 하여금 저승에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배려와 함께 점점 종교 의례적인 영향에 의해서 저승관이 변하고 있는 가능성을 나타내 준다. 그러한 배경에서 작용하고 있던 당시의 종교는 무속이었을 가능성이 제시되고 있다. 왜냐하면 부장품으로 나오는 청동의기와 형태가 같은 무구가 지금까지도 무속에서 쓰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무속이 시베리아의 무속과 연관성이 있다고 한다면, 당시 시베리아나 한반도의 생활은 수렵이나 채집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무속의 성격이 현세중심적이며, 굿의 내용이 잘 먹고 잘사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무속은 바로 궁핍한 생활조건에서 나타날 수 있었던 신앙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특히 수렵 채집생활은 주고 인간의 노동력이나 활동력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리고 부족한 생계자원 때문에 활동력이 없는 사람의 지위는 상당히 낮을 뿐만 아니라, 질병이나 노약은 거의 죽음과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승에서의 생활과 활동력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갖는 죽음의 의미는 생활과 활동의 정지라는 점에서 두려움과 공포라고 하겠다. 따라서 죽음과 질병은 꺼려지는 세계로서, 이승에서는 잊혀져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사자의례와 무속의 병굿, 그리고 수렵, 채집생활의 관계가 이해된다고 하겠다. 또한 선사시대의 묘제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무덤의 축조에 돌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흙 속에 묻는 토장과는 달리 특별한 기술과 인력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돌의 사용은 어느 정도의 권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은 조선시대까지 왕릉 석실로 만들고 있는 것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죽은 영혼이 무거운 돌 속에 갇혀 있기를 바라는 생각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돌은 죽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표지물로서도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면에서 무덤에 돌을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족국가의 권력집단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3. 낙랑시대와 삼국시대 낙랑시대의 고분은 한나라의 묘제를 그대로 본뜬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묘제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낙랑군의 영역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청천강ㆍ대동강ㆍ재령강의 중류, 하류지방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2세기 말경 남쪽으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하여, 황해도 서북부에 대방군을 두어,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중국으로부터 많은 문화적 영향을 받았음이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서 증명되고 있다. 이것은 한의 상장례가 직접적으로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친 계기로 보인다. 낙랑의 고분은 목곽분, 전축분으로 나누어지는데, 목곽분은 땅 속의 구덩이 바닥에 나무로 된 각재를 이중으로 깔고, 이 각재를 정자로 쌓아 올려서 4벽을 만든 다음, 그 외부 한쪽에 기둥을 세우고 판자로 칸막이를 하여 장방형의 내곽을 만들었으며, 다시 두 겹 각재로 천장을 덮고 있다. 형식으로 보아 토광목곽묘와 같은 계통으로 보이며, 머리는 북쪽으로, 부부를 한관 안에 넣되, 남자는 서쪽, 여자는 동쪽으로 배치하고 있다. 부부 외에 자녀들도 함께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족장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러 사람을 한 묘에 공동으로 묻는 복장의 경우, 보통 정상부를 필요한 만큼 까내어 천장각재를 들어내고, 위에서부터 관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목관 내의 시신은 명주로 여러 겹 감겨 있으며, 전형적인 경우에는 가슴 위로 벽, 두 손에 옥돈(玉豚), 시신의 9개의 구멍에는 옥제 마개로 막고, 특히 입에는 매미형 함(?)을 넣고 있다. 그리고 허리 근처에는 나무와 은으로 만든 도장을 놓았다. 부장품으로는 철기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침각명문(針刻銘文)을 통해서 기원전 85년에서 기원후 102년에 걸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벽에는 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묘제 형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 동옥저조에 나오는 상장례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다. 즉 “그들의 장사지내는 것을 보면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그 길이가 10m나 된다. 이것의 한쪽 모서리에 문을 만들어 놓는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가매장을 해 놓는다. 이 시체는 겨우 몸만 가릴 만큼 흙으로 덮었다가 살이 다 썩으면 그 뼈만을 추려서 이 곽 속에 넣는다. 이렇게 하여 온 집안 사람의 뼈가 이 한 곽 속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나무로 산 사람의 모양을 새겨 꽂아서 이 나무의 수효로 죽은 사람의 수를 알게 된다. 또 기와로 만든 솥을 곽 끝에 달아매고 그 속에 쌀을 넣어 두는 것이 그 나라 풍속이다”. 이러한 기록에서 보이는 묘제가 낙랑으로부터의 영향인지는 불명확하나, 우선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묘제의 형태뿐만 아니라 가족묘라는 점에서도 동일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신 처리에서도 정반대의 처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복장(複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탈육을 하여, 뼈를 추려 곽 속에 넣고 있는 것이다. 탈육은 이승에서의 형체를 없애는 과정이며, 뼈를 추는 것은 영혼이 뼛속에 깃들여 있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식량을 넣는다는 점은 낙랑의 부장품인 칠기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식량인 쌀은 당시로 보아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료들은 모두 이승에서 가졌던 형태에 대한 파괴, 저승에서의 귀한 양식으로 해석되어, 사자의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점은 나무로 죽은 사람의 모양을 새겨 두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상장례에서 종교ㆍ신앙적 영향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예라고 하겠다. 그 배경 역시 무속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수렵 채집생활에서 농경사회로 옮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어서 무속의 의례형태가 변모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사자의 구체적인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는 단순히 숫자를 알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의례대상물로서, 신상(神像)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추측되는데, 특별한 시기에 특정한 의례를 위한 대상물로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전축분(塼築墳)은 3세기경부터 많이 축조된 것으로 보이며, 중국에서는 기원전후부터 당, 속에서 이르기까지 많이 축조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실(玄室)은 지하에 두고, 벽은 절반 이상을 지표 위에 올려, 봉토로 덮고 있다. 현실의 평면은 방형으로서, 남쪽벽에 문을 두고 있다. 그리고 황해도 신천군 간성리에서는 벽돌 대신에 할석을 쓰고, 또 회칠까지 한 것과 함께 벽화도 있어, 고구려 석축분과의 연관성을 제시해 주고 있으며, 백제 초기의 석축분과의 연관성도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묘제는 선사시대의 것보다 우선 곽의 규모가 크고, 복장제로서 가족묘와 같은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이것은 선사시대와는 달리 가족 관념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으로, 선사시대에서는 죽음이 단장(單葬)을 통해서 개인전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복장제의 가족묘에서 나타나듯이 집단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농경의 발달에 따른 가족집단의 사회적 의미가 강화된 것으로, 일찍이 가족제도가 정착된 중국의 영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하겠다. 반면에 죽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관념이 복장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그에 따라 묘의 건축에도 나무나 벽돌과 같이 인공재료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저승집, 또는 죽은 사람의 집이라는 개념으로서 무덤을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목곽분과 같은 경우는 시신처리로 보아 도교사상을 일면을 나타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영생불사를 위한 처리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즉 명주로 여러 겹을 감았다든가, 옥제품으로 구멍을 막은 것들도 모두 미라를 위한 조치로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념은 우리 나라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낙랑의 고분 축조 기술이나 무덤의 양식은 후대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나, 죽음을 인식하는 이러한 도교관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낙랑시대와는 달리 만주지방의 원주민 사이에서 부족연맹체로 존재했었을 부여에서는 사자의례에 의한 상장례가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고조선 시기와 마찬가지로 강력한 왕권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외교적으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여의 죽음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는 명확하지 않으나, 기록을 통해서 상장례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부여조에 의하면, 《魏略》에서 인용하여 상장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다섯 달 동안 집에 두는데, 오래 둘수록 좋은 것으로 여긴다.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는 데는 음식을 날 것으로 장만하고, 익힌 것으로도 한다. 상주된 사람은 되도록 장례를 빨리 지내려 하지 않지만 타인들이 억지로 지내게 한다. 거상시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고 여자는 목걸이나 패물을 떼 놓는다. 이런 풍속은 대체로 중국과 방불한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사람이 여름에 죽으면 모두 얼음을 채워 두고 또 사람을 죽여 순장한다. 순장하는데 있어 사람을 많이 죽일 때는 백여 명까지 죽인다. 그리고 장례를 후하게 지내는 사람은 관은 있어도 곽은 없다”고 되어 있다.《후한서》동이전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곽은 없다. 사람을 죽여 순장시키는데, 숫자가 많은 자는 백 명이나 되었다. 또 임금이 죽으면 옥갑에 넣어 장사지낸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항상 미리 옥갑을 만들어서 현도군에 보내 두었다가 임금이 죽으면 이것을 갖다가 장사지내게 했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우선 왕의 장례와 일반의 장례는 달랐을 것으로 보이면, 순장의 경우는 왕에 한해서 행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순장되는 사람들은 왕이 생전에 거느리던 개인 노예였을 것으로 보이며, 그 규모로 보아 당시 권력의 비중을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 옥갑의 크기는 아마도 전신장이 가능한 크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여름이면 얼음을 사용하여 부패를 방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신을 5개월 이상이나 집안에 두고, 또 늦게 장사지낼수록 좋다고 하는 생각 등을 통해서 보았을 때, 시신을 생시와 같이 보존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장례는 탈육을 하는 것에 비해서 전혀 다른 영혼관을 갖는다.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며, 도교적인 색채를 띠는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혹시 낙랑의 목곽분과 같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은 조상숭배의 신앙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상복과 제사에 관한 기록을 통해서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이기백 전게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조상숭배의 초기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고구려의 장례도 문헌기록에 부분적으로 보이는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혼인만 하면 벌써 죽어서 장사지낼 때 입힐 옷을 장만한다. 그리고 장사는 후하게 지낸다. 금과 음, 돈, 폐백 같은 것을 후하게 써서 장사를 지낸다. 그리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봉분 앞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묘제는 적석총이었으며, 죽음에 대한 관념은 그렇게 두려웠던 것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후장을 하는 것으로 보아 사자의례의 성격을 아직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하면, 고구려 초기인 5세기까지는 적석총과 석총이, 그리고 그 후에는 봉토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적석총은 동침(東枕)으로 목관을 사용하고 있다. 환인지방의 대표적인 예는 기단부에 1변 11m 이상 크기로 돌을 깔고 1층은 1m 높이에 1변 8m, 2층은 0.5m 높이에 길이 6.4m 크기로 되어 있다. 형태는 단독장과 합장이 섞여 있으며, 특징은 관대가 지상에 놓이고 있는 점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방형계단식 적석총으로 가장 발달한 것이 장군총이라고 하겠다. 한편《수서》동이전 고려조에도 상장례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다. “죽은 사람은 집안에 빈소를 만들어 놓았다가 3년이 지난 뒤에 길일을 가려서 장사를 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죽었을 때는 모두 3년 복을 입고, 형제간에는 석 달을 입는다. 초종을 치를 때는 모두 곡하고 울지만, 장사를 치르고 나면 북을 치고 춤추면서 풍류를 아뢰어서 죽은 이를 보내는 예를 베푼다. 매장이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에 입던 옷과 수레와 말을 가져다가 무덤 곁에 갖다 두면 장례에 온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가져간다”. 이 내용을 보면 묘제는 적석총이 아니라 봉토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빈?삼년장?길일장?상복제 등과 같은 내용은 유교식 상장례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반면에 “장사를 치르고 나면 북을 치고 춤추면서 풍류를 아뢰어서 죽은 이를 보내는 예를 베푼다”는 내용은 비유교적 상장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의 상장례가 유교식으로 행해지고 있으면서도 상여가 나갈 때나 매장할 때, 상여소리나 달구소리로 흥을 돋우고 있는 것이나, 중부지방에서 무당들이 매장 후에 집에서 하는 굿인 자리걷이 등이 병행되어 행해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또한 죽은 사람이 생시에 지니던 일용품을 남에게 주어 버리는 것은 사자의례에서 흔히 나타나는 의례적인 행위하고 하겠다. 따라서 이 기록은 아마도 중국의 영향에 의해서 상장례는 유교적 조상숭배에 근거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예전부터 내려오는 사자의례의 모습을 남기고 있는 내용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기록은 《수서》에 보이듯이, 고구려 후기에 이미 유교적 조상숭배 의례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인 시기의 상장례의 현상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중국식 상장례의 영향에 의해 이루어진 고구려의 묘제로 봉토분을 들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황해도 안악의 동수묘(冬壽墓)라고 하겠다. 이것은 현무암과 석회암의 판석으로 전후의 석실을 남북방향으로 만들고 있으며, 전실에는 좌우로 조그만 측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천장은 말각조정으로 처리하였다. 측실에는 주인공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살림집을 벽화로 그렸으며, 전실에는 무사와 백관들의 행렬도를 벽화로 그리고 있다. 모든 봉토분이 모두 벽화를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벽화가 있는 묘는 왕이나 유력한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하겠다. 벽화의 내용으로 보아 당시에는 이미 불교가 들어왔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사상보다는 도교적인 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벽화의 내용이 주인공의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생불사를 목표로 하고 있는 도교사상의 반영으로 보인다. 특히 이러한 점은 벽화에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그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이러한 묘제의 기본사상은 현생의 사회적 지위와 생활을 저승에서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조상숭배로 발전하기까지의 저승관을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흔히 계세사상으로 표현되고 있는 관념으로서, 사자의례의 저승 관념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성격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상은 아직까지는 명확히 밝혀지고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의 벽화고분으로 알려지고 있는 거창 둔마리의 고분이나, 안동 사삼동의 고분에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왕릉의 석실벽에 그리는 사신도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현재로서는 명확히 연구되어 있지 않다. 거의 같은 시기의 삼한에서는 기록으로 보아 사자의례가 행해졌던 것 같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사람이 죽어 장사지낼 때에는 큰 새의 날개를 다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이 날아가는 듯하다는 뜻일 게다”라는 것으로 보아 영혼을 새에 실려 보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마한조에는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내는 데에는 관을 쓰지만 곽을 쓰지 않느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닐 줄은 모른다. 그래서 이 소나 말은 모두 사람이 죽어 장사지내는데 쓴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곽이나 석실과 같은 ‘죽음의 집’이라는 개념은 없이 단지 관을 사용하여 시신을 처리하고, 장사를 하나의 잔치로 생각한 것 같다. 소나 말은 후장으로 해석하기 하나, 장례식의 잔치음식으로 보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삼한지역으로 추정되는 백제와 신라지역의 고분에 대한 구체적인 고고학적 자료는 밝혀지지 않은 채, 백제와 고신라의 고분으로 분류되고 있다. 고이왕 때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확립한 백제의 고분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식의 복장용 설실계통이며, 그 입구도 남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도굴이 쉬워 묘제 이와에 완전한 부장품을 갖고 있는 고분이 거의 없어, 연구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 초기 백제의 중심지였던 서울지방의 고분도 적석총과 봉토분으로 나누어지며, 봉토분은 다시 석실총과 토광묘로 나눌 수 있다. 적석총은 3단으로 된 계단식 적석총으로서 환인 부근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과 형태가 같다. 그것도 왕이나 귀족의 무덤으로 추측되는데 왜냐하면 《삼국사기》의 개로왕조의 기록, 즉 “큰 돌을 욱리강에서 주워 석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었다”고 한 것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토광묘는 땅 위에 구덩이를 파고 목관을 매장한 것으로, 앞에서 본 마한의 기록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석실묘는, 가락동고분의 예로 볼 때, 방형 석실의 남벽 중앙에 입구와 연도가 달리는 고구려식 방선형(方扇形)평면으로 되어 있다. 공주지방의 고분을 기본적으로 방형 석실묘, 장방형 석실묘, 전축분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방형 석실묘는 고구려식의 ㄱ자평면에 도움전장을 가진 횡혈식 석실로서, 고구려의 단실묘를 본보기로 하고 있다. 장방형 석실묘는 길이 3m 정도의 크기로 남쪽 벽에 짧은 연도가 달리는 횡혈식이다. 전축분은 중국 남한의 영향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이면, 현실이나 연도가 모두 터널식으로 되어 있으며, 현실의 벽에는 회칠을 하고 사신도를 그리고 있다. 도굴되지 않은 채 발굴된 무령왕릉에 의하면, 서쪽에 왕비, 동쪽에 왕의 관이 놓이고, 머리는 남쪽에 두고 있다. 목관은 검은 옻칠을 하였으며, 빈약한 부장품으로 보아 저승에서의 생활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죽은 영혼의 신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에서 특이한 것은 매지권(賣地券)으로 알려진 석판으로, 지신으로부터 묘터를 산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 있는 것과 중국 양나라의 오수철전(五銖鐵錢)한 꾸러미가 함께 발견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땅의 매매에 의한 사유권과 함께 분묘를 죽은 영혼의 집에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저승의 삶은 이승의 삶과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으로 부장품의 내용이 술병, 술잔, 현금 등으로 보아 혹시 도교의 영향이나 중국 민간신앙의 반영이 아닐까 보여지기도 한다. 그 밖에 낙랑의 고분과도 같은 중국식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까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지 않다. 부여의 고분으로는 화강암으로 쌓은 장방형의 석실분과 옹관 등이 발견되고 있는데, 석실분에는 벽화가 발견되어, 고구려의 것과 통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옹관들은 길이 82cm 정도의 것으로 화장골호나 세골장용이 아니면 어린아이의 관으로 추측된다. 부장품으로는 발견되고 있는 것이 전혀 없어, 더 이상의 성격규명이 불가능한 실정이다. 그 가운데서도 석실분은 낙랑과 공주지역, 그리고 고구려의 고분들과의 연관성이 높을 것으로 보아,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진 상태이다. 백제의 고분은 총괄적으로 보아 중국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이는 횡혈식 석실분 계통과 비교적 토착적인 것으로 보이는 옹관과 토광묘 계통의 것으로 나눌 수 있으며, 전자에는 도교나 중국 민간신앙의 영향을, 후자에는 사자의례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헌기록으로 《주서》 이역전(異域傳)백제조에 의하면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 3년 동안 복을 입는다. 그 나머지 친척들은 장사만 치르면 이내 복을 벗는다”는 내용으로 보아, 일찍부터 3년 상이 치러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증거는 무령왕릉에 매지권에 보이는 피장자를 사망년월일과 장사일이 3년의 간격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서도 잘 증명된다고 하겠다. 3년상은 현재까지는 유교의 상장례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밖에도 도교나 중국 민간신앙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져 있다. 고신라시대의 고분은 기본적으로 지석묘의 지하구조에서 출발하여, 김해시대의 석곽묘로 이어지는 단장 석곽묘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복장용 석실묘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고구려?백제의 것과 다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지하에 밀폐식으로 보존되어 있어 도굴이 쉽지 않아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경주지방의 고분은 적석목곽분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유해가 묻히는 주곽 이외에 부장품을 넣기 위한 부곽이 나란히 있다. 이 적석목곽분은 평지에 구덩이를 파고, 시신은 동침하여 단독장으로하며, 풍부한 부장품을 넣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사자의례식 상장례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복장제에 따른 묘에 문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단장제, 부장품의 유무, 벽화의 유무 등이 모두 죽음관, 저승관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자의례의 경우 생시의 생활모습은 물론, 오히려 그보다도 더 화려하고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한 배려가 뒤따르는데, 신라의 적석목곽분의 경우가 바로 좋은 예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부장품으로는 금은?옥제품 등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낙동강 동쪽에서는 석곽묘와 석실묘가 발견되고 있는데, 그 장축은 동서방향이 기본이나, 나중에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남북으로 바뀌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석곽묘는 수혈식과 횡구식으로 나누어지는데, 수혈식은 동래의 경우, 남침으로 되어 있으며 부장품으로는 철제무기와 많은 토기가 발견되고 있다. 횡구식 석곽묘는 수혈식보다 후기에 발전된 것으로 보이며, 창녕의 경우 장축이 남북으로 되어 있다. 부장품으로는 금제품과 토기, 항아리, 고배 등이 발견되고 있다. 석실문은 연도가 달리고 문이 달려 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으로 보여진다. 양산의 경우, 방향은 동서 장축이며 복장제다. 영풍군 순흥의 고분은 벽과 천장에 벽화와 연화를 그리고 (‘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 구조가 백제, 고구려계의 ㄱ자형과 함께 벽화의 내용으로 보아 낙랑과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자료들은 사자의례보다는 도교 또는 중국 민간신앙적 상장의례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것은 곧 이승과 저승이 연속되어 있다고 보는 관념으로써, 죽음의 세계는 이승의 세계와 별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승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거나, 영생불사의 사상으로 시신을 완전히 보존하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은 조상숭배의 관념은 나타나고 있지 않은 단계라고 하겠다. 통일 신라시대에 들어, 경주에서 발견되는 묘제는 석실묘, 왕릉, 화장묘로 나누어진다. 석실묘는 고구려ㆍ백제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복장제로 되어 있어, 부부가 한 곳에 매장괴고 있다. 그러나 연도가 서쪽에 있으며, 장축이 주로 남북으로 되어 있다. 연도가 서쪽에 있는 것은 전통적인 동침의 흔적을, 그리고 장축이 남북으로 된 것은 외부 즉, 고구려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자의례에서 조상숭배의례로 변하는 과도기적인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왕릉이라고 전하는 것들은 봉토 아래를 자연석으로 둘러 봉토의 붕괴를 막도록 되어 있으며, 이러한 형식은 고구려의 적석총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는 12지신상을 새긴 판석으로 돌리고 있으며, 이러한 전통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릉에도 이어지고 있다. 내부는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알려지지 않았으나 도굴된 신덕왕릉에 의해 그 구조가 알려지고 있다. 이 능의 구조는 남쪽으로 연도가 달린 석실로서, 현실은 방선형이다. 그리고 벽은 채색되어 있으며, 복장제로 되어 있다. 구조로 보아 고구려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김원용, 전게서). 화장묘의 경우, 수중릉과 같이 특수한 형식도 있지만, 그 밖에 장골처도 알려지고 있다. 장골처는 불교식 장법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물 속에 만든 것은 특수한 경우나, 대부분은 골호에 담에 땅에 묻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골호들은 주로 남산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화장지와 함께 한때 성공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부도도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불교식 상장례가 많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불교가 성행했었으므로, 역시 화장이 많이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되나, 구체적으로 알려지고 있지는 않다. 불교식 상장례의 본질은 시신을 불태우는데 있다. 이것은 이승관념에 의한 것으로, 이승의 세계를 오염되고, 더러운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깨끗한 저승에 가기 위해서는 이승의 형체를 없애는 방법으로 불을 태우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념은 사자의례나 도교적 영생불사를 위한 배려와는 전혀 다른 상장례로서,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시대까지 성행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서민들 간에는 그렇게 행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시신을 땅에 묻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장례의 보편화에 따라 나타난 현상은 우선 사자의례나 도교적 사상에서 보듯이, 화려한 부장품이나 이승을 닮은 죽음의 집이라고 생각되는 무덤을 축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왕릉이나, 조선시대에서 보듯이 봉토분의 축조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지하구조가 갖고 있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고 하겠다. 4.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고분은 구조상으로 석실묘, 석관묘, 토광묘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왕과 귀족들은 석실묘를, 귀족이나 상류층 인사들은 화장을 하여 석관묘를, 일반인들은 주로 토광묘를 쓴 것 같다. 그리고 당시에는 점차 관학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유교에 의한 상장례와 국교의 지위에 있었던 불교에 의한 화장이 함께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신라 말부터 성행되기 시작한 풍수지리설의 영향에 의하여 화장보다는 매장법이 유교식 상장례와 함께 널리 보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불교식 장례보다는 점차로 유교식의 조상숭배의례가 제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흔히 고려 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부터 강화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하나, 이미 광종 때의 과거시험이나, 11세기 초에 건립된 국자감 등을 통해서 보았을 때, 고려 초부터 유교식 조상숭배 사상에 의한 상장례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고려시대의 상장례는 예부터 내려온 사자의례, 불교의례, 도교의례, 유교의례적 조상숭배가 각각 다양하게 행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점은 당시의 사회가 다양한 신앙형태를 인정하고 있는 점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 다고 하겠다. 석실묘는 몇기의 왕릉이 도굴됨에 따라 밝혀진 구조와, 위치로 보았을 때 다분히 풍수지리설에 따른 명당의 조건을 갖춘 곳에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내부는 다듬질한 장대석으로 네 벽을 쌓고, 판석 석 장으로 천장을 덮은 남북 장축의 방형석실이다. 벽과 천장은 모두 회칠을 하고 청색은 주색으로 성진도를 그렸으며, 벽화가 있다. 벽화 가운데에는 12지신상, 주악천녀, 무용도 등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고구려, 낙랑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도교적 영향도 배제되지 않았다. 석곽묘는 수혈식으로, 다듬질한 화강석으로 3단으로 쌓아 벽을 만들고, 천장을 덮은 상자형 석곽으로서, 네 벽과 천장에 회칠을 한 다음 12지신상과 성신도를 그렸다. 앞의 석실묘와 같은 계통과 신앙적 배경을 가졌을 것으로 보이나 귀족 아니면 지방호족의 무덤일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전신장과는 달리 화장일 경우에는 뼈를 일정기간 동안 사찰에 모셨다가 장사지내는 이중장제로서, 그 관은 주로 넙적한 점판암으로 만들어졌던 것 같다. 이 석관의 바깥에는 4신, 또는 12지신상 등을 새기기도 하고, 지석을 새겨 함께 묻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교식 묘제로 석실묘 또는 석곽묘의 절충형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 밖에 토광묘는 정남북을 장축으로 하여 목관을 넣은 것으로, 흔히 서민들의 무덤으로 알려지고있으나, 그것은 조선시대에 성행한 유교식토광묘와 같은 유형이라고 하겠다.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 보았을 때, 고려 초기부터 3년상이 성행하여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켜, 이것을 단축한 예가 많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3년상의 달수를 날수로 고쳐, 경종 때에는 13일 소상을, 27일에 대상을 치르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성종 때에는 복제에 따라 휴가를 주는 제도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은, 유교식 상장례가 이미 고려초부터 있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라고 하겠다. 뿐만 아니라 묘제에서는 중구그이 법제도를 따르고 있기도 한다. 따라서 묘의 크기에 있어서 제한 규정을 두고 있는 것으로, 경종 원년에 1품의 묘를 사방 90보로 하고, 차차품계에 따라 크기를 작게 하여 6품 이라는 30보까지 제한하고 있다. 고려의 상장제를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자료는 고려말의 기록에서 종종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여묘제(廬墓制)라고 하겠다. 이것은 오복제와 함께 유교적 상장례의 하나로 보여진다. 특히 3년간의 여묘는 의종 때부터 나타나는데, 《고려사》에 보이는 여묘는 의종 때 손응시, 명종 때의 장선부, 충선왕 때의 김광재, 우왕 때의 하운원, 정몽주 등에 의해서 행해진 것으로 되어 있으며, 국가에서 포상을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바로 조상숭배 사상을 장려한 것으로, 본격적인 조상숭배에 근거한 상장제의 시행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자가례가 실시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하겠다. 5. 조선시대 선사시대의 사자의례는 신라의 왕릉에서 공식적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이며, 낙랑과 고구려?백제의 석실묘제에 나타나는 중국 및 도교적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상장례는 고구려의 왕릉을 거쳐 조선시대의 왕릉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통일신라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불교적 화장법은 고려 말까지 매골ㆍ골장제에 의해서 지속되었던 것 같다. 한편 일찍부터 백제시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3년상은 고려시대까지 나타나다가, 한때 불교의 영향으로 100일, 또는 그 이내에 탈상을 하도록 하는 변화를 보이기도 했으나, 고려 말부터 다시 여묘제와 함께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조상숭배에 의한 상장례의 길을 열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주자의 《가례》의 의한 상장례가 고려 말에 수입되면서 조서시대의 대표적인 상장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의 정치적 이념을 성리학에서 찾고자 했던 지배계층의 노력의 결과라고 하겠다. 조선시대의 상장례를 종합한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왕릉의 구조는 석실분으로서, 고려의 왕릉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반면에 벽화로는 12지신상이 아니라 사신도가 발견되고 있다. 그러한 전통은 고구려와 낙랑의 고분벽화에서 나타나, 그대로 지배자의 상장제를 대표하는 것으로 살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상장제의 절차는 송나라 때부터 확립되기 시작한 성리학의 의례체계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성리학의 의례체제를 가장 잘 집약하고 있는 《가례》의 절차와 비교해 보면 거의 동일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중국왕실의 것과의 비교에 의해서 밝혀질 것으로 보이나, 중국의 능묘제나 절차와도 상당히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 《가례》의 상장례는 조상숭배의 사상을 최고도로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추원보본을 근본으로 하고있는 것이 유교의 상장제이기 때문이다. 그 절차에 의하면 죽음은 숨이 넘어가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이어서 하늘로 올라간 영혼을 초혼하여 시신에 다시 실리는 절차를 밝교 있다. 그런 다음 영좌를 설치하여 혼백을 모시고, 이어서 명정도 마련한다. 매장한 다음에는 신주를 만들어, 죽은 조상의 영혼이 의지하고 있는 신체로 인식하고, 상청, 즉 궤연에 모신다. 3년상을 지낸 뒤에는 신주를 사당에 모시고 4대를 지날 때까지 모시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죽은 조상을 대신하는 신체로서, 혼백ㆍ명정ㆍ신주 등이 절차에 따라 시신을 대신해서 상장례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자의 가례에서는 조상신으로 모셔, 특정한 시기마다, 즉 식사 때나 초하루나 보름, 그리고 명절 때마나 상식ㆍ삭망제ㆍ다례 들을 지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살아 있는 어른에게 고하듯이 낱낱이 고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종교적 배경의 상장례와의 큰 차이는 이러한 정기적인 의례와 함께 조상신의 거처인 사당을 살아 있는 사람의 살림집과 같이 건립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곳이 관례?혼례?상례나 제례와 같은 행사의 중심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절차 외에도 흔히 ‘사자밥’이라고 하여, 죽은 혼을 저승으로 잘 데려가 달라는 뜻으로 저승사자에게 사자밥을 차려 주는 절차도 나타나고 있다. 그것도 사자가 3명이라고 인식하여 3그릇의 밥, 짚신 3켤레, 간장 3그릇과 함께 동전을 키나 상에 차려 대문 바께 놓는다. 이러한 절차는, 양반가문에서는 조상숭배식 상장례와 어긋난다고 하여 차리지 않는 곳도 있다. 이것은 불교식이나 사자의례의 흔적으로 해석된다. 유교적 상장례에 의해 조상숭배적 상장례의 절차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비유교적 영혼관에 의한 절차가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곳에 따라서 장례를 다 치른 다음에 무당을 불러 씻김굿이나 자리걷이와 같이 살던 집을 깨끗이 정화하는 사자의례적 절차를 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성리학적 상장제의 묘제는 기본적으로 토광묘와 목곽묘의 혼합형태를 보이고 있다. 곳에 따라 석관을 사용하기도 한다. 즉 토광을 남북장축으로 파고 관을 넣은 다음에 횡대라고 하여 몇 개의 판자로 토광을 덮고 있기 때문이며, 또 그 위에 석회로 단단히 다져 마치 그 형태가 곽과 같은 모습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가례》에서는 부정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풍수지리설에 의해서 길지로 생각되는 곳에 조상의 시신을 모심으로써 후손들에게 발복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풍수지리를 잘 아는 지관이나 지사가 반드시 상장례의 절차를 참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6. 결론 고고학적 자료나 역사적 기록자료를 통해서 보았을 때, 우리 나라의 상장례는 사자의례와 조상숭배가 혼합되어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활조건이 불확실한 상태였던 선사시대의 단독장과 풍부한 부장품의 전통은 사자의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한 전통은 권력집단이 등장하면서, 돌을 이용하여 권위의 표시와 함께 죽음의 세계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사용하면서, 죽음에 대한 관념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승과 저승을 왕래하는 문이나 방의 형태를 만들어 이승과 저승을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죽음의 세계는 이승과 단절된 두렵고 꺼리는 세계가 아니라 죽음을 이승에 받아 들이고, 한편으로는 이승과 이어지는 세계라는 인식이라고 하겠다. 그 다음부터는 중국문화의 영향이 우리나라에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중국에서의 일반적인 죽음관은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흔적은 도교적 관념에서 엿보이는데,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저승을 이승과 동일하게 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념에서 나타나는 것이 낙랑의 고분들이며, 그 대표적인 증거로 벽화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단독장과는 달리 복수장으로서, 가족단위의 묘제와 함께 이승에 대한 모든 생활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저승의 집이라는 관념으로 무덤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사자의례의 모습은 고구려에 들어와서는 그대로 유지되어 3년상의 모습을 띠고 있다. 그리고 낙랑의 영향을 받아 위의 3계통이 뒤섞인 상장례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고구려의 석실묘는 사자의례에서 조상숭배의례로 이행되어 가는 과도기적 상장례의 묘제로 등장하면서, 권력을 가진 계층의 묘제로 정착되어,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왕릉의 기본 묘제로서 전통을 잇고 있다. 고구려의 상황은 백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백제의 고분들도 대부분이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고 있으며 3년상제도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고신라의 경우는 적석목곽분과 함께 사자의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불교의 수입에 의해 화장제가 등장하면서, 죽음관 또는 영혼관에 큰 변화를 보이면서, 죽은 후에도 이승의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자 하는 사상이 나타난다고 하겠다. 그 대표적인 예로 문무왕이 동해의 바위에 수장되어 호국용이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왕릉도 대부분 석실분으로서 고구려 묘제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유교식 상장례의 시행과 함께 본격적인 조상숭배의례가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사상적 특수성에 의해서 사자의례와 함께 도교ㆍ불교ㆍ유교식 상장례가 공존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속을 바탕으로 한 사자의례는 일반서민계층에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권력층에서는 도ㆍ불ㆍ유교적 상장례가 혼합되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왕릉은 여전히 고구려 계통의 석실분이 중심이 되어 있되, 그 배경으로 영생불사의 도교사상과 조상숭배의 유교사상이 혼합되어 작용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말에 주자학이 도입되면서 여묘제와 함께 조상숭배사상에 의한 상장례가 강력히 장려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권력층에서는 불교배척과 함께 사자의례ㆍ도교사상ㆍ불교적 상장례를 강력히 비판하는 경향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법제화되어 조상숭배에 의한 상장례, 특히 성리학적 상장례가 보편화되었다. 조상숭배에 의한 상장례의 특징은 초혼과 함께 조상의 신주를 이승에 모시는 상청과 사당이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당을 건립할 수 없을 때에는 단지 신주만을 4대 동안 모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상청은 3년간 일상생활 공간에 모시는데,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드리고 삭망에 상식을 올리는 등 죽은 조상을 살아 있을 때처럼 모시는 장소로서, 조상숭배의례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전래와 함께 일제 때부터 나타난 현대적 도시 생활양식에 의해 이러한 조상숭배의례는 점차 그 영향력이 감소되어,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근대적 화장이 도시지역에서 성행하고 있으며, 3년 탈상은 형식적으로만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1934년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공고한 ‘표준의례’와 함께 1968년에 정부에서 공표한 ‘가정의례준칙’에 의하여 조상숭배의례는 대폭 간소화되어, 지금은 사자의례도, 조상숭배의례도 아닌 의례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 형식과 절차는 대폭 간소화되고 조상숭배의 핵심도 사라졌지만, 조상숭배사상은 아직도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있다고 하겠다. 출처 : 생활개혁실천협의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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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화장장려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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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매장이 아닌 화장시 지원하는 보조금으로 지자체에 따라 금액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노인지원과등 장사시설 담당부서에서 신청양식을 구비하고 있사오니 신청서에 기재하시어 신청하시면 됩니다. 기존의 매장묘지를 개장하여 화장하는 경우는 지자체별로 별도의 개장장려금등으로 지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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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한부매장제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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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 매장제란 2001년 이후로 설치된 '매장묘'의 경우, 최대 60년이후에는 개장하여 화장하도록 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합니다. 아래 보건복지부 지침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아 래 - 1. 분묘의 설치기간의 제한 2001. 1. 13일부터 설치된 분묘에 대하여만 적용됩니다. 따라서, 2001. 1. 13일 이전에 설치된 분묘에 대하여는 그 적용이 없습니다. 다만, 2001. 1. 13일 이전에 설치된 분묘를 개장하거나 합장을 하는 경우에는 분묘의 설치기간의 제한이 있습니다. (법 제17조 및 제18조) 2. 분묘의 기본 설치기간 기본 설치기간은 15년입니다. 다만,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관할 구역안의 묘지의 수급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때에는 조례가 정하는 바에 따라 5년이상 15년미만의 기간내에서 분묘 설치기간의 연장기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 합장분묘의 경우에는 합장된 날을 기준으로 산정합니다. 3. 설치기간의 연장방법 및 절차 (1) 설치기간의 연장신청자 : 분묘의 연고자 (2) 연장신청 회수 : 15년씩 연장신청하되 3회에 한함 (3) 연장신청방법 : 분묘의 설치기간 만료일부터 3월 이내에 묘지소재지를 파악할 수 있는 위치도(약도) 또는 사진을 첨부하여 분묘설치기간연장신청서를 작성 (4) 연장신청기관 ① 공설묘지에 설치된 분묘 : 관할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 ② 개인묘지, 가족묘지 및 종중·문중묘지에 설치된 분묘 : 관할 시장·군수·구청장 ③ 법인묘지에 설치된 분묘 : 당해 법인묘지의 설치·관리자 (5) 분묘설치기간연장증명서의 교부 ① 시장·군수·구청장 또는 법인묘지의 설치·관리자는 분묘설치기간의 연장신청을 받은 때에는 분묘설치기간연장증명서를 교부하여야 함 ② 법인묘지의 설치·관리자가 분묘설치기간을 연장한 경우에는 14일 이내에 이를 시장·군수·구청장에게 보고 (6) 연장신청사항의 묘적부 기재 - 시장·군수·구청장은 분묘설치기간연장증명서를 교부하였거나 법인묘지의 설치·관리자가 분묘설치기간의 연장보고를 한 경우에는 그 분묘설치기간연장사항을 묘적부에 기재 (7) 설치기간이 종료된 분묘 등의 처리(법 제18조) ① 설치기간이 종료된 분묘의 연고자가 설치기간이 종료된 날부터 1년이내에 당해 분묘에 설치된 시설물을 철거하고 매장된 유골을 화장 또는 납골하여야 함 ② 분묘의 연고자가 설치기간이 종료된 분묘 등을 철거 및 화장·납골을 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공설묘지 또는 사설묘지의 설치자가 당해 분묘에 설치된 시설물을 철거하고 매장된 유골을 화장하여 일정기간 이를 납골할 수 있음 ☞ 공설묘지 또는 사설묘지의 설치자는 분묘 등의 철거 및 화장·납골조치를 하고자 하는 때에는 미리 기간을 정하여 당해 분묘의 연고자에게 통보하여야 하며,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에는 그 뜻을 공고하여야 합니다. * 출처 : 보건복지부 노인복지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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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윤달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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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달이란 ? 양력(약365일) 과 음력(약354일)의 약 11일 정도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넣은 달을 윤달이라고 합니다. 윤달이 있는 해(▲)는 음력이 12달 보다 한달 많은 13달이 되는데, 여벌이 남는 달이라 하여 '여벌달','공달'또는 '덤달'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신이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쉬는 기간으로 그때는 불경스러운 행동도 신의 벌을 피할 수 있다' 라고 여겨, 부정을 타지 않는 달로 인식하였습니다. 이때문에 윤달에는 수의를 마련하거나 조상들의 묘를 이장을 하는 집들이 많습니다. 묘는 잘 못건드리면 신벌을 받는다고 하는데, 윤달에는 괜찮다는 것이지요. 또한 '윤달은 간섭하는 기운이 없어 혼인하기에 좋다' 라고 하여 결혼날을 따로 보지 않아도 될 만큼 좋은 시기 라는 얘기인데, 요즘은 세월이 흐르면서 반대로 '윤달은 귀신도 모르는 달' 이라고 하여 '귀신이 활동하지 않는다' 믿기 때문에,경사스러운 날에 돌아가신 조상들이 음덕을 받을수 없다는 뜻이 되어 윤달에는 결혼 날짜는 잡지 않게 된것이지요. 사실 윤달에 결혼이거나 태어나는 사람들은 거의 4년에 한번씩 기념일이 돌아오지 않아 꺼려지는것이 현실적인 이유가 되겠죠? 올해는 음력 3월을 윤 3월이라 하여 양력으로 2012년 4월 21일 부터 5월 20일 까지인데요, 윤달에는 '송장을 거꾸로 메달아도 탈이 나지 않는다' 말이 있습니다. * 출처 : 연암공업대학교 김은빈님 카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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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봉안당의 계약철회시 환불 기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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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안시설의 경우, 이용약관에서 계약철회시 환불에 대한 규정을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안당 이용계약시 약관내용을 자세히 검토하신 후 계약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적으로 지난 2012년 6월 공정거래위윈회에서는 전국 봉안당 162개소를 직권조사하여 불공정약관을 사용하고 있는 10개 공설시설과 12개 사설시설에 대해 시정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계약철회시 환불기준은 아래와 같으며 봉안시설별로 약관상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봉안후 1년이내 -> 50% 2년이내 -> 40% 3년이내 -> 30% 4년이내 -> 20% 5년이내 -> 10% 5년초과 -> 0% * 출처 : 공정거래위원회 보도자료 (2010.06.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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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엠바밍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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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바밍(embalming)’이라 불리는 시신 방부처리는 이집트나 잉카 등 여러 고대 문명에서 행해지던 장묘 방식 가운데 하나다. 십자군전쟁이나 미국 남북전쟁 때도 시신을 고향까지 옮겨 매장하기 위해 엠바밍이 행해졌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의 경우도 잠자는 모습처럼 방부처리 돼 2년 동안 일반에 공개됐다. 20세기 들어 엠바밍은 주로 사회주의 국가 지도자 장례에 사용됐다. 구소련의 레닌(1924년)을 시작으로 스탈린(53년)과 중국 마오쩌둥(76년), 북한 김일성(94년)까지 모두 9명의 시신이 방부처리 됐다. 이들의 엠바밍은 매장 전 부패를 막기 위한 일시적 처리가 아니라 인민들에게 혁명 1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영구적 처리다. 하지만 당사자들은 이를 원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레닌은 어머니 묘 옆에 매장해 달라고 했고, 마오도 화장해서 중국 산하에 뿌려달라고 했지만 호치민처럼 유언이 지켜지지 못했다. 고노무현 대통령과 고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시신도 엠바밍 처리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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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연분묘의 처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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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분묘란 연고자가 없는 분묘(시체나 유골을 매장한 시설이며, 이하 “무연분묘”라 함)를 말합니다(「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2조제6호 및 제28조제1항). 타인의 토지에 설치된 분묘의 연고자가 없는 경우에는 장사등에관한법률의 규정에 따라 미리 3개월 이상의 기간을 정하여 그 뜻을 공고한 후 관할관청의 개장허가를 받아 개장할 수 있으며 무연분묘의 판단기준에 대하여는 장사법상 규정한 바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구체적인 무연분묘 개장허가에 대한 사항은 주변 여건등을 고려하여 허가관청에서 판단할 사항입니다. 아래의 지방자치단체등에서 실시하는 무연분묘의 처리절차를 참고 바랍니다. 1.무연분묘 일제조사 -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른 일제 조사 결과 무연분묘를 확인한 경우 그 무연분묘에 매장된 시체 또는 유골을 화장하여 일정 기간 봉안할 수 있습니다(「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28조제1항). 2.무연분묘의 개장공고 - 공고 사항 ·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무연분묘에 매장된 시체나 유골을 화장하여 봉안하려는 경우에는 다음의 사항을 공고해야 합니다(「장사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19조제1항). √ 묘지 또는 분묘의 위치 및 장소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14조 제1항 제1호 가목 √ 개장사유, 개장 후 안치 장소 및 기간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14조 제1항 제1호 나목 √ 연락처, 열람 등 개장에 필요한 사항 - 공고 방법 ·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공고를 무연분묘에 매장된 시체나 유골을 화장하여 봉안하기 2개월 전에 중앙일간신문을 포함한 둘 이상의 일간신문 또는 관할 시·도 및 시·군·구의 인터넷 홈페이지와 하나 이상의 일간신문에 2회 이상 하되, 두 번째 공고는 첫 번째 공고일부터 1개월이 지난 후에 다시 해야 합니다「장사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19조 제2항 - 시·도지사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봉안한 유골의 연고자가 확인을 요구하면 그 요구에 따라야 합니다 「장사 등에 관한 법률」 제28조 제3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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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1 | Q MS의 사업내용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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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메모리얼 소싸이어티는 어떤 사업을 하시는가요?
- 요양시설 및 요양서비스 개발사업 (요양병원, 요양Complex, 요양단지) - 장례문화 ICT 콘텐츠 개발 (메모리얼 콘텐츠 등) - 장례서비스 O2O플랫폼 구축 및 운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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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st1 | Q MS(메모리얼 소싸이어티)는 어떤 점이 다른가요? |
A
Q : MS(메모리얼 소싸이어티)는 타 업체와 어떤 점이 다른가요?
A : 장사시설 산업은 그동안 공급자위주의 시장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현재까지도 장사시설 산업부문은 공급자위주의 시장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해외 장사시설 선진국에서는 국내의 이러한 현황을 장사산업 불모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사시설 공급업자가 1차상품인 장사시설을 개발.공급하고 있으며, 장사시설 유통업체는 주로 장례식장등의 밀착영업을 통해 At-need 분야의 장사시설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장사시설 소비자인 구매자에게 정확한 상품정보를 전달하고 관련 서비스를 개발하여 소비자 편의를 증진시키고 소비자 권익을 보호하는 서비스(소프트웨어)의 개발은 아직 뒷전인게 현실입니다. MS(메모리얼 소싸이어티)는 구매자(장사시설 소비자)를 중심으로 하는 장사시설 개발과 서비스 공급을 그 사업내용으로 합니다. 현재의 장사시설 공급행태에 만족하지 않고 구매자의 입장에서 구매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장사시설 개발과 서비스 및 유통에 관한 다양한 솔루션을 개발.공급하고, 이를 통해 장사시설 개발 및 유통분야의 구매자 인지도 1위를 확보하는 것이 MS의 목표이자 차별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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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현장에 가보지 않고도 장사시설 구매가 가능한가요? | |
A
Q : 현장에 가보지 않고도 장사시설 구매가 가능한가요?
A : 장지를 선택할 경우, 현장답사는 기본입니다. 그러나, 바쁘고 여유없는 현대생활에서 시간을 내어 여러곳의 장지현장 답사를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사에서는 구매자의 장사시설 선택에 있어 현장답사를 대신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드립니다. 장사시설, 주변환경, 찾아가는 길등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고해상도 사진파일과 동영상 파일로 편집,제공해 드림으로 현장답사와 동일한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PC, 노트북등의 기기를 활용해 해당 자료를 가족, 친지등 어르신께 보여드릴 수 있으며, 장지선택에 관한 가족회의에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