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안과 의사, 최초의 안과병원 개원, 최초의 국산 하드렌즈 개발, 최초의 쌍꺼풀 수술 시행…, 의사라면 대략 누구인지 알 겁니다. 1995년 오늘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공병우 박사입니다.
공 박사의 죽음은 이틀이 지나서 당시 연세대를 출입하던 동아일보 김희경 기자(현 여성가족부 차관)의 특종 기사를 통해서 알려졌고, 당시 PC통신 게시판은 고인에 대한 조의 글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언론에서는 “네티즌들의 사회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공 박사는 병원에서 환자를 보다가 눈병치료를 받으러 온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을 만나고 난 뒤 한글 보급에 온힘을 쏟습니다. 이극로 선생은 영화 “말모이”에서 류정환(윤계상)의 실제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공 박사는 일본어 시력검사표를 한글로 바꿨고,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병해서 보급합니다. 세벌식 키보드를 써 본 사람은 2벌식보다 속도가 훨씬 빠르고 오자가 적은데다 편리하다고 한목소리를 내더군요. 한때 급속히 보급됐지만, 정부의 표준정책에 소외되는 바람에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었지만 아직까지 애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공 박사는 별세하기 직전까지 PC통신에서 세벌식 타자의 우수성을 알리는 글을 남겼는데, 그때 누리꾼들의 “무지한 욕”에 개의치 않고 계속 글을 썼습니다. 당시 인숭무레기들의 무례한 글들을 보면서 덩달아 속을 끓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공 박사는 한국일보에 의해 “한국의 고집쟁이” 6위로 선정됐습니다. 1등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었고, 3등이 외솔 최현배 박사였습니다. 공 박사는 일본강점기 때 일본이 창씨개명을 요구하자 “공병우는 죽었다”며 거부했습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세금을 많이 냈지만 해질 때까지 옷을 입고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러나 맹인부흥원을 설립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타자기, 지팡이를 개발하는 등 평생 장님을 위한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한글학회와 YMCA에도 상당한 재산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공 박사는 우리 민족이 본질보다는 형식, 체면을 중시하고 시간을 함부로 쓰며 게을러서 나라를 빼앗겼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집안의 문지방을 모두 없애버렸고, 파격적으로 화장실을 집안에 설치해서 주위 사람의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못사는 나라에서 옷치장에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며 한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결혼식에서 며느리에게 폐백 절하는 것보다 악수나 한번 하자고 청했습니다. 시간을 금 쪽 같이 여겨 5분 이상 머리를 깎는 이발소, 낮에 열리는 결혼식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평생 생일잔치를 하지 않았고 미리 예약하지 않고 온 손님은 아무리 귀한 사람이라도 돌려보냈습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한 60대 언론인을 만나 얘기하던 중 길거리에서 “젊은 사람이 컴퓨터도 안 배우느냐”고 호통을 쳤다고 합니다. 그는 “젊음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공부를 하며 사회에 열심히 공헌하느냐가 잣대”라고 말해왔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젊게 살다가 떠났습니다. 그의 유언은 지금도 가슴을 울립니다. 24년이 지난 오늘도….
“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라.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와 시신은 모두 병원에 기증하라. 죽어서 한 평 땅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
* 출처 : 코메디닷컴 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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