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문동환 목사가 9일 오후 5시50분쯤 별세했다. 향년 98세다.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였던 1921년 5월5일 독립신문 기자였던 문재린 목사와 여성운동가인 김신묵 여사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고인은 북간도 명동촌이 고향이다. 형은 고(故) 문익환 목사이며 윤동주 시인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
1938년 은진중학교를 마치고 은사인 김재준 목사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신학교와 일본 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 용정 만보산초등학교와 명신여고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인 1951년 미국 유학을 떠나 웨스트 신학교, 프린스턴 신학교를 거쳐 하트퍼드 신학대학에서 종교 교육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 만난 해리엇 페이 핀치백(문혜림) 여사와 결혼했다. 1
1961년 귀국해 모교인 한국신학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 전태일 분신과 유신헌법 공포를 겪으며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5년 동료 해직 교수인 서남동 안병무 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를 마련했다.
1976년 3월 1일엔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22개월간 복역했다. YH사건으로 또다시 구속됐다가 유신정권 몰락 시점에 출옥해 복직했다.
1979년 유신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한신대 교수로 복직했지만 전두환 정권에 의해 다시 해직돼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5년 귀국해 한신대에 복직했으며 이듬해에 정년으로 퇴임했다. 퇴임 후 미국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도움을 준 인연으로 1988년 평화민주당에 수석부총재가 됐다. 국회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3당 합당에 반대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1992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던 고인은 2013년 귀국해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구조적 원인이 미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라는 문제인식을 토대로 민중 신학을 더욱 심화시켰다.[
*출처 : 국민일보 2019.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