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원 | 황해문화 편집장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선생 59주기 추모제에 다녀왔다. 해마다 7월31일, 당신이 사형당한 시각인 11시에 맞춰 추모제가 열린다. 그 시각 서울광장에서는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이자 동지였던 고(故) 박정기 선생의 노제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7월은 유난히 기억해야 할 죽음이 많다. 여운형 선생이 7월19일, 작가 최인훈 선생과 노회찬 의원이 7월23일, 박정기 선생이 7월28일에 세상을 떠났다.
죽산 선생 추모제에 드나들기 시작한 지 10년이 훨씬 넘다 보니, 이제는 조금씩 일도 거드는 사이가 되었다. 어떤 행사에 꾸준히 나가다 보면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신경림 선생이 죽산의 장례 풍경을 묘사한 작품 ‘그날’에서 “젊은 여자가 혼자서/ 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던 젊은 여자는 생전의 죽산을 닮은 따님 조호정 여사였다. 해마다 나오셨지만, 이제는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몇 해 전부터는 뵐 수가 없다. 그사이 돌아가신 분들도 꽤 된다.
내가 노회찬 의원과 처음 대면한 곳도 2012년 죽산 추모제 자리에서였다. 조봉암 선생은 이 땅의 민중과 진보정치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진보정치인 중에 당신의 추모제에 직접 찾아온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이승만 독재정권과 투쟁했던 까닭에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돌아가신 분이었기에 엄혹한 시절 “사람들은 가로수와 전봇대 뒤에 숨어서” 그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2011년 대법원 재심을 통해 억울한 누명이 풀리고 무죄가 확정되면서 추모 화환도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문재인 대통령의 화환이 왔지만, 죽산의 서훈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가로 고초를 겪고, 건국과정에서 제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토지개혁을 한 죽산이지만, 국가보훈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의 1941년 12월23일자 단신 기사를 문제 삼아 서훈을 거부하고 있다. 그 기사에 따르면 ‘인천 서경정(지금의 중구 내동)에 사는 조봉암씨가 국방헌금 150원을 냈다’는 것이다. 당시 죽산의 주소가 부평이었다는 기록, 그런 거금을 낼 형편이 아니었다는 증언과 이만한 인물이 단신 처리되었겠냐는 의문이 있음에도 국가보훈처는 유가족에게 자료를 보완해 제출하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얼마 전 EBS에서 정부의 서훈제도를 집중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건국 이래 우리 정부가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수여한 훈장은 총 222명 440건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중에는 일제강점기 친일파 경찰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고,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의 비호 아래 반공투사로 변신하여 반민특위 주요 인사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으며, 약산 김원봉 선생을 잔인하게 고문한 노덕술도 세 차례나 훈장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일제 치하에서는 독립운동가를 학살하고, 해방 후에는 국군으로 변신하여 일본도로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하는 등 참혹한 만행을 저지른 김종원에게 우리 정부가 수여한 훈장은 무려 10여개에 달한다.
역대 대통령의 셀프 서훈도 문제지만, 일개 언론사인 조선일보가 수여하는 청룡봉사상 수상자에게 1계급 특진을 주는 것은 더욱 큰 문제다. 이 상의 충(忠) 부문 수상자 중 상당수는 과거 군사독재 시절 무고한 시민을 간첩으로 몰았던 이들이며, 그 가운데에는 고문기술자 이근안도 포함되어 있다. 고문조작사건의 진상이 드러난 뒤에도 조선일보는 수상을 취소하기는커녕 이후 수상자에 대해 보안상 이유를 들어 익명으로 시상하고 있다. 조봉암 묘소 앞 비석에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가 훈장 받자고 독립운동을 하고, 독재와 싸우고, 평화통일을 외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 사람으로 나는 지금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인지, 누구를 위한 나라인지 알고 싶다.
* 출처 : 경향신문 201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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