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 공고

추모문화제 안내

[김홍빈 추모 특집 ① 김홍빈을 말하다
관리자
2021-07-30

undefined
안중국 국립등산학교 교장

 

1990년대 후반 언제인가, 산악계 행사장에서 만난 김홍빈과 악수하다가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의 열손가락 상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뭉툭한 덩어리로 만져지던 그의 손이 주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하지만 그는 씨익 웃었다. 

“괜찮습니다, 형님. 누구든지 처음엔 다 그래요.”

 

1991년 7월 매킨리봉 중턱에서 헬기로 긴급 후송된 김홍빈은 곧 따뜻한 물통 속에 담겨졌다. 온몸 곳곳이 동상으로 시퍼렇게 변한 채였고 손가락은 아예 숯덩이였다. 앵커리지 병원의 의사는 그의 손가락들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엉덩이 살을 옮겨 붙이는 수술을 7번이나 반복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김홍빈은 중환자실에서 열흘이 지나서야 의식을 되찾았고, 손가락이 모두 잘려나간 양 손을 보며 오열했다. 그런 그가 훗날 자신의 인생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던 매킨리(데날리)봉을 다시 찾아와 끝내 등정해내고 말 것임을, 그후 7대륙 최고봉에 이어 히말라야 8,000m 14좌까지도 모두 오를 것임을 그 의사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잘라낸 부위가 옷깃만 스쳐도 아파하고 조금 세게 부딪치면 상처가 터지며 피를 흘리던 아들이 30년 세월을 절치부심하여 14좌 완등의 꿈을 이루리라고 그의 어머니는 짐작이나 했을까.

 

스물일곱 살 청년이었던 91년 매킨리 등반 사고 때 그는 8천미터 봉을 하나도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후 그가 이제 14좌 완등의 성취를 이룰 때까지 꼬박 30년 세월이 걸렸다. 첫 등정인 2006년 가셔브룸2봉부터 따지면 15년이다. 다른 14좌 완등자들에 비해 한결 길다. 그럴 수밖에.

매킨리 사고 때 그는 폐수종과 뇌부종도 겪었다. 의사는 다시 고산에 가면 사망 확률이 50%가 넘을 것이라 했다. 실제로 고소 적응 속도가 전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니 남들 같은 빠른 등반은 불가능했다.

 

등반은커녕 일상생활을 이어가기조차도 버거웠을 것이다. 먹고 입고 배설하는 모든 일에서 타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와 매킨리 원정 전부터 함께 합숙하면서 히말라야 고봉 원정 훈련을 해왔던 정득채를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 했다. 좌절하고 아파하는 그를 대소변도 받아주고 목욕도 시켜주면서, 부둥켜안고 같이 엉엉 울어주기도 했던 후배다.

 

삶은 그가 몇 번 자살까지 시도하며 벗어나고자 하는 나락으로 변했다. 보험회사에서 전기회사 전산실로, 골프장으로 전전하며 살아보려 애를 썼지만 ‘손가락 없음’은 엄청난 벽이었다. 좌절하여 뒷산 숲을 걷는데 누군가 아이에게 속삭였다. 저기 저렇게 손이 없는 사람도 힘들다 하지 않고 올라가지 않니. 자신이 누군가에겐 본보기도 될 수 있다는 자각이 몸을 휘감았다. 그렇게 그는 남은 생을 ‘희망 전도사’로 살기로 작정하고, 그때 그는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우선은 마음 바꾸기에 몰두했다. 매킨리에서 그렇게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단독 등반을 주로 좋아했던 나는 외려 진즉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원망의 마음을 긍정과 고마움으로 바꾸어 채우자 매킨리를 다시 오르고 싶어졌고, 사고 7년 뒤인 1998년 기어이 매킨리 정상에 올랐다.

 

그가 다시 산을 시작해 14좌 완등을 이루기까지, 등반의 시작부터 끝까지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엄지와 검지의 극히 일부를 재생하는 수술이 성공, 숟가락이나 포크 정도는 어렵게나마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외 배낭을 꾸리고, 등산화 끈을 매고 하는 것 모두가 혼자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특히 용변 문제에서 그의 고산등반 도우미를 자처한 이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006년 가셔브룸 등반 때 후배 김미곤은 텐트 설치는 물론, 양말과 등산화를 신겨주고 아이젠을 채워주었다. 김홍빈은 다른 등반가들처럼 폴이나 피켈을 사용할 수 없어서 로프에 걸어 당기는 도구인 주마(등강기)에만 오로지 의지해 등반해야 했다. 이렇듯 등강기를 다음 로프로 일일이 갈아 끼워주는 일도 그가 대신 해주었다. 에베레스트 남동릉 등반 때는 위험 구간인 힐러리스텝에 이어 정상까지 고정로프를 깔아 김홍빈이 안전하게 등정할 수 있게 했다.

 

2006년 시샤팡마는 조선대팀이 루트를 앞서 뚫으며 배려해주어 무난히 오를 수 있었다. 여러 봉에서 여러 등반대가 그의 ‘더부살이 등반’ 때문에 전진이 느려졌다. 그가 등정을 할 수 있게끔 속도를 늦추거나 캠프를 늘이고, 고정로프를 추가로 설치했다. 손재주가 뛰어난 후배 조벽래는 그가 팔에 차고 빙벽등반을 할 수 있게끔 고안한 아이스바일을 선물했다. 누군가는 수시로 보약을 지어주고, 누군가는 그의 치아 관리를, 신장결석을, 혹은 척추 관리를 책임져주었다.

 

그의 14좌 완등은 불가능해 보였기에, 선뜻 그의 후원사로 나서려 하는 업체가 드물었다. 그런 때면 선후배들이 십시일반으로 등반비를 거두어 주었다. 이렇듯 그와 그의 주변 선후배들 모두가 함께 ‘김홍빈의 14좌 완등’을 이루어냈다. 김홍빈의 의지와 더불어 헌신으로써 그의 장애를 함께 넘어선 그들 모두의 14좌는 그 어떤 14좌보다도 더 값지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만 마음을 놓아버린 것인가. 그간의 기적 같았던 운도 다해버린 것인가. 마지막 봉 브로드피크 등정 후 하산길에 그는 실족해 크레바스에 빠졌고, 등강기가 이탈, 결국 긴긴 절벽으로 추락해 사라졌다. 그는 이제 다 끝냈다며 ‘희망’만을 남기고 훌쩍 우리 곁을 떠난 것인가.  

 

* 출처 : 월간 산 2021. 8월호

* 원문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