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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리얼 노트, 조용기 목사
관리자
2021-09-20

출생과 성장 그리고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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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는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부친 조두천씨와 모친 김복선 여사의 5남 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학, 유교, 불교철학에 해박한 부친으로부터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부산 동래 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부친이 민의원 선거에 낙선하여 가세가 기울자 기술자가 되려고 부산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런데 마침 그 학교 근처에 미군 부대가 있어서 미군 병사들에게 영어를 배울 수 있었고 교장 선생님과 부대장간의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병석에서도 영어 사전을 외우고 교과서를 독파하며 삶의 의지를 불 태웠다.

그러던 어느날 병 문안을 온 누나의 친구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병이 호전되지 않자 공기가 맑은 고향 진장에 내려가 휴양을 하면서 부산으로 통원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인 켄 타이즈 선교사가 부산의 한 거리에서 인도하던 천막 부흥성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게 되었다. 그후 타이즈 선교사의 통역을 돕기도 하며 많은 기독교 서적을 탐독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확신이 없어 신앙적으로 갈등하다가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다. 금식기도를 하던 어느날 밤, 찬란한 광채 속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나게 되었고, 성령충만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6년 서울에 올라와 순복음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는 바로 여기에서 후에 목회의 동역자요, 장모가 된 최자실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대조동 개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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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복음신학교를 1958년 졸업한 조목사는 최목사와 함께 5월 18일 서울 변두리 대조동 최목사의 집에서 최목사의 세 자녀들과 함께 창립예배를 드렸다.

 

성도들은 겨울에도 천막 교회에서 추위와 싸우며 밤새 철야기도와 새벽예배를 드렸고, 낮에는 대조동 일대를 다니며 전도했다.

 

6.25 전쟁 직후의 황폐한 생활 속에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목사는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케 되는 삼중축복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 각종 질병이 치유되었으며, 성도들의 삶은 소망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1월 조목사는 갑자기 군대 입영장을 받았다. 교회개척 3년만에 재적 성도 4백 명이 되었으며, 교회부지 6백 평을 구입하여 성전을 건축하려던 터라 실로 난감했다. 그는 입영 며칠 전,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천막 교회를 찾아왔다는 존 허스톤 선교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그해 1월 군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하던 중, 심한 장질환으로 인해 수도육군병원에서 사선을 넘나드는 대수술을 받고 대전 63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차도가 없자 결국 7개월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의병 제대하게 되었다.

 

 

여의도 교회의 세계적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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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새성전의 건축 공사가 시작하자마자 중동 석유 파동이 일어났으며, 달러에 대한 원화가치가 하락했다. 이로 인해 건축 자재 값은 폭등하고 많은 성도들이 실직하여 헌금이 줄어든데다 은행의 융자도 축소되어 부채 압박이 극에 달했다. 여기에 건축 기술상의 문제까지 겹쳐서 교회 건축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조목사는 매일 밤 골조만 앙상하게 올라간 성전 지하실에서 뚝뚝 떨어지는 녹물을 맞으며 목숨을 걸고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다가 지쳐서 시멘트 바닥에 쓰러질 때가 수없이 많았다.

 

그러자 성도들 사이에도 뜨거운 마음으로 교회 살리기 운동이 일어나 매일 저녁 수백 명의 성도들이 지하실 바닥에 함께 엎드려 간절히 금식하고 기도했다.

 

그 결과 성전은 다시 조금씩 올라가기 시작하여 마침내 1만명을 수용하는 성전이 완공되어, 1973년 9월 23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헌당 예배를 드렸다.

 

기도원을 찾는 발길이 늘어나자 1982년 9월에는 1만석을 가진 새 성전을 완공하여 헌당 예배를 드렸다. 최자실 목사가 경기도 파주군에 있던 교회묘지 창고에서 철야하고 금식하던 자리에서부터 발전한 기도원은 오늘날에는 하루 평균 3천 5백여명의 성도들과 매년 1만여명 이상의 외국인 성도들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금식기도원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여의도로 이전한 이후, 교회는 급속도의 수직적인 성장을 보였다. 1979년에는 10만 성도를 돌파했고, 1981년에는 2배로 증가한 20만 성도가 되었다.

 

교회의 내적 성숙과 교육을 위해 제 1, 2교육관을 세우게 되었으며, 선교센터를 세워 선교사를 훈련시켜 파송하여 해외선교에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교회 명칭을 현재의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바꾼 1984년에는 40만성도가 되었으며 1992년에는 70만명을 돌파하였다. 거리가 먼 지역에 지성전을 건립하기 시작, 지역사회 복음화의 효율적 방편으로 여러 교회를 독립시키게 되었다.

 

조목사는 47년간의 목회 생활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감사드리며 현재 75만명의 재적 성도를 한결같은 자세로 섬기고 있다.

 

새 천년이 시작되는 2천년부터 향후 10년 동안의 목표는 국내 전역에 5백내지 5천 교회개척, 5백 기도처 설립, 인터넷 방송을 통한 전세계 선교 확장, 제 3세계와 북한을 비롯한 해외 선교의 장을 적극 넓히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조목사는 전 성도들과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새로운 결심과 믿음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좇아가고 있다.

 

* 출처 : 여의도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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