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 공고

메모리얼 News

[기고] 죽음과 그 문화에 관하여
관리자
2025-04-25

undefined
정윤수 성공회대 교수

내 기억 속의 가장 멀리 있는 장면은,아주 어렸을 때, 소백산 골짜기가 고향인데, 동네 어르신이 돌아가셨고, 그래서 아이들까지 만장을 들던 풍경이다.

온동네가 함께 장례를 치렀다. 

 

모두 함께 상여를 따라 개울과 논두렁과 산길을 헤쳐 무덤으로 올라갔고, 그 행렬에 죽음이 뭔지 그리고 당연히 삶이 뭔지도 모를, 나같은 꼬마도 만장들고 올라갔다.


70∼80년대 서울의 풍경을 더듬어 보면, 그때만 해도 삶의 마지막을 동네 사람들이 함께 했다. 변두리 동네에 이따금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근조등’이 켜져 있고 그 등불을 따라가다 보면 마당이나 비좁은 골목에 문상객들이 모여 앉아 있곤 했다.90년대 초반만 해도,심지어 아파트 단지의 화단에 조문객들이 둘러앉는 일도 있었다.

그런 풍경은 세기말부터 서서히 사라졌고 세기초에는 완전히 없어졌다. 삶의 마지막은 물론 죽음의 며칠동안도 이제는 대형병원의 장례식장이 도맡기 시작했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도덕적 이유라기보다는 불가피하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심리적,공간적,경제적 이유 때문이었다.힘겹게 일해서 겨우 아파트 한칸 장만했는데 잊을 만하면 단지 안에서 장례식이 치러진다면,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공간으로보나 경제적으로나 보나,고인이 마지막 투병하던 곳에서 곧바로 지하의 영안실로,또 거기서 조문을 받고,그런 후에 도시 외곽의 묘지로 영결하는 것이 ‘합리적’인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21세기 초의 병원 장례식 문화에서 못마땅한 게 한둘은 아니었다. 임권택 감독의 <축제> 같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온동네 사람 다 모여 울다가 웃고 또 통곡을 하는 전통의 풍경이야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해도,어디서 누가 확정한 것인지 모를,전국 병원 장례식 담당자들이 맹약이라도 맺은 듯 단일한 형식,단일한 음식,단일한 행위 규범이 썩 매끄럽지는 않았다.

그 무렵 어느 대형병원은 술,담배,도박,음식,밤샘 등을 금지하는 ‘5불정책’을 한동안 시행했는데, 유족을 위로한답시고 밤새워 화투를 치고 술을 마시는 것이야 사라져 마땅한 것이지만, 뒤늦게 소식을 알고 찾아온 사람이 밤이 늦었다는 이유로 조문을 못하거나 조문객과 유족이 국 그릇 하나 놓고 잠시 고인을 추모하는 일마저도 금지하였으니,오래 가지 못할 정책이었다.

그래서 오래 못갔다.유족과 조문객의 항의도 있었겠지만,바로 그 음식을 나눠먹는 일을 포함한 제반의 장례문화가 실은 상당한 수익이 된다는 것을,그 병원뿐만 아니라 전국 도처의 병원들이 실천했기 때문이다.서울대병원의 경우 2010년도 의료수익이 2009년보다 868억원(9.2%) 증가한 1조318억원에 달하는데, 이 중에서 주차장이나 장례식장 운영 등의 의료외 수익이 무려 6.1% 늘어난 1171억원에 이른다.

그랬는데,요즘의 풍경은 점점 더 견디기 힘든 상황이다.드라마에서 죽음이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20세기의 드라마에서는 고인이 가족들 품에서 죽어갔다.그랬는데 21세기에는 대형병원의 중환자실에서 홀로 고독하게 죽어간다. 위생과 의료의 이유로 철저히 ‘관리’되기 때문에 겨우 임종을 지키는 정도다.더욱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가족들의 요양병원 면회가 어렵고 조문객들이 장례식장에 가는 것도 크게 줄었다.지금 죽어가는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더 고독하게 죽어간다.

현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남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는 “쉽고 평화롭게 죽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그 대답이 구해지지 않았다”고 했거니와, 코로나19 사태의 한복판에 있는 우리 사회가 바로 지금 그런 상황이다.

출처 : 강원도민일보 2021.03.12 

원문link